중생이 절에 가는 법
중생이 절에 가는 법
  • 고원영
  • 승인 2015.06.2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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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 낮은 데서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재미가 등산에는 있다. 물론 엄홍길이나 박영석처럼 산소마스크를 쓰고 히말라야 꼭대기를 사투하듯 오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둘레길이 생기면서 낮은 곳에서 느리게 걷는 재미가 생기고, 제주도 올레길이 생기면서 사람이 사는 마을길과 골목길을 걷는 재미가 생겼다. 얼마 전 어느 신문사에서 주관한 ‘길의 인문학’이란 제목의 걷기 운동은 길에서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오는 지적 재미까지 덧붙이고 있다.

걷기는 몸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을 불러온다. 길을 걸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생각이 혈관을 타고 흐르고, 나를 돌아보게 되는 뒷 근육이 생긴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듯 걸어야 할 내가 출퇴근길의 지하철 계단에서 그랬 듯이 숲길을 뛰듯이 오르내렸다니. 김성철 교수가 도시인의 허구를 지적했듯이, ‘옷으로 몸을 가리고 산길 대신 엘리베이터를 탔을 뿐, 매일매일 먹어야 산다는 사실에 쫓기는 포유류’와 무엇이 달랐던가. 머리를 재빨리 쳐들어 거래처를 찾고 꼬리를 끌어 엘리베이터에 감추는 포유류의 모습이 꼭 나였다.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면 도반들의 잡담이 그치지 않는다. 둘레길의 완만함, 수평에 가까운 길이 우리의 숨구멍을 저절로 열어놓은 것이다.

당신이 불자라면 그 숨구멍을 통해 쉴 새 없이 나오는 말이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부처가 주장한 연기緣起로는 내 말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이란 우선 뇌에서 분비한 생각이고, 허파와 성대와 혀와 입술의 움직임이고, 생각과 움직임이 결합해서 생기는 소리이다. 그뿐 아니라, 말이란 타인의 귀와 인식의 검증을 받는다. 이처럼 여러 조건이 모여서 말이 되므로, 어느 하나만 빠지거나 변해도 소리가 나지 않거나 달라진다. ‘내 말소리’는 이렇게 연기한 것이다.

둘레길에서의 잡담은 나와 타인의 연기가 활발함을 의미한다. 수평에 가까운 길이라서 가능해진 현상이다. 높은 산 오를수록 고독해진다. 함께 걷던 사람들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내 곁에서 길을 열어줬던 나무와 새들도 사라진다. 오로지 등산화를 묵묵히 내려다보면서 걷어야 하는 길. 그 길에서 어느 날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고독이 깨달음에 이르는 절대적인 길일까. 그런 길을 홀로 걷기 이전에 우리는 도시의 온갖 관공서와 회사와 지하철과 백화점과 컴퓨터, 그것들을 전승하는 언어체계에서 충분히 고독하지 않았었나. 선승이 세상을 등지고, 알피니스트가 추위와 희박한 공기를 뚫고 산의 정상에 오른다고 무엇이 달라지고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정상이란 곳이 대관절 세상 어디에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정상 위에 정상이 있다. 설악산 대청봉 위에 백두산 천지가 있고, 천지 위에 알프스의 몽블랑이 있고, 몽블랑 위에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가 있고, 에베레스트 위에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제석천이 있다. 세상에는 올라야 할 정상이 너무 많구나!

누군가 외롭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달라이라마는 대답하더란다. 나는 외롭지 않아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항상 수많은 누군가와 함께 있습니다. 이 옷과 이 음식이 나에게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쳤을진대 어찌 내가 외로울 수 있겠습니까.” 달라이라마는 부처의 연기법을 나름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부처의 연기법은 높은 데보다 낮은 데서 더 잘 보인다. 거기에 나무와 풀들이, 새들이,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당신이 혼자서 숲길을 지날 때도 예외는 아니다. 당신의 발끝에 툭, 돌멩이가 차이는 순간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 이것이 도반이구나. 지금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나의 도반이구나. 그 순간 홀로 있어도 무언가 마음속에 꽉 들어찬다.

이에 대해 재가불자在家佛子이자 수의학자인 우희종 서울대 교수의 설명은 사뭇 체계적이다. 그는 생명을 네 가지 현상으로 분류한다.

모든 생명은 형태가 있다. 모든 생명은 대사 작용을 한다. 즉 먹고 마시는 항상성이 있다. 모든 생명은 자기 복제를 한다. 모든 생명은 진화한다.

우희종은 이 네 가지 생명 현상을 나타내는 물체를 생명체라 정의한다. 그리고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에 어우러지는 현상을 생태계라 정의한다. 불교에서의 생태계는 생물과 무생물과의 관계로도 그 영역을 확대한다. 연기법이 당신과 돌멩이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숲을 거닐면 ‘나’라는 존재는 다른 생명체, 혹은 비생명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것들은, 내 가치와 의미에 영향을 주는 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으로 유명한 수경 스님은 여기에 관해 성찰한다. 그가 어느 강연회에서 들려줬던 말을 옮겨본다.

“우리 사찰의 매력은 숲을 끼고 있다는 겁니다. 숲은 생명력을 갖고 있지요. 사찰에서도 숲길을 만들어 걸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숲은 병든 몸을 치유합니다. 수행에도 그보다 좋을 순 없지요.”

둘레길에 촘촘히 선 나무들에서 물이끼 냄새가 풍겨온다. 어디선가 하루살이들이 날아와서 얼굴을 간지럽힌다. 흙길에 떨어진 거울 조각에 비친 나뭇가지가 조만간 무성해질 잎사귀들을 예고한다. 엊그제 내린 비가 파놓은 웅덩이 물거울에 구름 몇 조각이 둥둥 떠다닌다. 이 모두가 천천히 걷지 않았을 때는 만날 수 없었던 풍경들이다.

불가에 행선行禪이라는 말이 있다. 두 손을 복부에 모아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화두를 한 번씩 염한다는 수행법이다.

부처의 시대에는 이보다 더 활동적이었다. 승속을 떠나 수행자들은 끊임없이 길을 유행했다.간화선만이 올바른 수행법이란 것은 옛말이다. 수경 스님은 한국불교의 간화선 병에 대해서도 진단했다.

“봉암사에서 20여 년 간화선을 수행한 한 스님이 내게 하소연하더라 이겁니다.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갑갑해 미치겠다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요.”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서 스님은 말을 이었다. “사찰 대부분 신도들의 신행은 기도와 염불과 참회가 주류를 이룹니다. 그런데도 조계종단에서는 여전히 간화선의 진작만을 내세우지요. 신도들을 수행 유목민화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불교의 외호대중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뒷바라지해 주는 스님들인 불자 대부분의 신앙 행위가 간화선이 아닌데도 종단 차원의 배려가 없잖아요? 참선 이외의 많은 수행 방편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대해 폭넓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도반들의 잡담이 숲길을 지난다. 우리는 지금 저 절로 간다.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저절로 간다. 우리가 가는 절은 화계사이다. 수경 스님이 맹렬하게 환경운동을 펼쳤을 때 주지로 있던 절이다. 화계사는 또 해외포교의 선두주자였던 숭산 스님이 조실로 있던 절이다. 화계사로 가는 길에서 아직은 설익은 봄 내음이 풍긴다. 곧 농익은 봄이 오겠지. 산수유가 지천으로 싹을 올리고, 가까운 산 개나리, 먼 산 진달래를 볼 날도 머지않으리라. 어디선가 목련꽃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다. 둘레길은 산자락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목련의 흰빛을 눈부시게 만날지 알 수 없는 길이다. 눈앞에 보이는 저 길모퉁이를 돌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군가 소리친다.

“배고프다!”

누군가 또 소리친다.

“나도!”

절보다도 꽃보다도 밥이 더 간절한 게 중생이다. 배낭을 끌러 점심상을 차린다. 먹는다. 재개발 아파트 현장에서 야참을 먹는 노가다들처럼 땅바닥에 빙 둘러앉아 먹는다. 누군가 상추쌈을 입에 가득 물고 화계사에 핀 작약꽃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화계사에서 골짜기를 건너가면 삼성암인데 영험하기로 운문사 사리암에 버금가는 나반존자가 계신다고 한다. 모두 거기까지 가자고 입을 모은다.

웃는다. 사실 숲에서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팔 할이 웃음이다. 웃기 위해 말하는 셈이다.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사오십 명이 모이는 우리는 ‘웃음부대’이다. 우리는 웃음을 배낭에 짊어지고, 웃음을 소총에 장전하고, 웃음을 철모 대신 쓰고 숲을 지나지만 우리 곁에 있는 꽃과 나무와 돌들은 우리의 진격을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중생인 것이 어떤 때는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으로 사는 삶을 부처의 삶으로 여긴다. 중생은 ‘무리지어衆 사는 것生’이다. 숲속의 나무와 돌과 풀들처럼 무리지어 사는 삶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때라야만 평등과 자비를 실천할 줄 아는 부처가 된다. 부처가 전한 말을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중생이 이미 부처이다. 부처는, 이 세상은 본래 고통스럽다고 했지만 그걸 어찌 알랴. 상추는 된장의 일을 모르고, 된장은 상추의 일을 모르는데.

* 걷는 길 : 길음역 11번 출구 - 201번 버스 승차 - 정릉 대우아파트 하차 - 북한산 둘레길 - 화계사 - 삼성암   거리와 시간 : 7km 정도, 3시간 예상(휴식 시간 포함)

 

 

 

 

 

 

 

글, 사진 고원영

산악인이며 여행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과 달리 우리나라는 국토 전체가 성지순례 길임을 통찰하여 108군데의 불교 성지순례길을 답사하고 기록할 뿐 아니라, 성당과 수도원 이야기를 쓰는 등 주로 종교기행을 통한 힐링 글에 전념하고 있다. ‘걸어서 절에 가면 몸뿐 아니라 정신이 운동한다’고 주장하며 때때로 대중을 규합한다. 현재 등산과 걷기여행 모임인 ‘서울불교산악회’와 ‘저절로가는길’을 이끌고 있으며, 2010년 장편소설 ‘나뭇잎 병사’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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