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의 여정 슬기롭게 받아들인, ‘진(晉) 문공 희중이(姬重耳)' 편
인고의 여정 슬기롭게 받아들인, ‘진(晉) 문공 희중이(姬重耳)' 편
  • 임나경 소설가/수필가
  • 승인 2019.10.2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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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속 인물들의 매력을 찾아서(4)
진문공 중이 초상화 (그림출처 SinoWiki)
진문공 중이 초상화 (그림출처 SinoWiki)

그리스 신화의 많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 중 필자가 각별한 애정을 느끼는 인물은 오디세우스이다. 지혜로운 명장으로 전쟁의 승리자였으나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신들의 옹졸함으로 십년의 세월을 타향살이하며 힘든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국 신들이 탄생시킨 인간의 타고난 의지로 모든 장애를 극복하게 됨으로서 나를 비롯한 모든 인류에게 시대를 초월한 크나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필자가 <오디세이아>를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실제 역사 속 인물이 있으니 그는 바로 19년을 힘들게 여섯 나라를 떠돌며 갖은 고생을 했으나 생의 마지막 시간은 그 누구보다 눈부셨던 ‘진(晉)나라 문공’이다.

진 문공 ‘희중이(姬重耳)’는 춘추 오패 중 하나이다. 성은 ‘희’, 휘는 ‘중이’, 시호는 ‘문공’으로 진 헌공의 둘째 아들이다. 43세가 될 때까지 진 문공이 될 중이는 여타 상류층 자제들이 그러하듯 화려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며 살았다. 넉넉한 품성과 함께 나름 야망이 있었던지 17세부터 ‘조쇠’, ‘호언’, ‘가타’, ‘선진’, ‘위주’를 곁에 두었는데, 이들은 중이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충신으로 후일 기록된다.

진 문공 중이의 부친인 ‘진 헌공’은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여인인 ‘제강’과 간통하며 아들까지 낳았던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아버지의 여자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재위기간 동안 많은 여인을 통해 많은 아들 또한 얻게 되는데, 아버지의 후궁인 제강과의 사이에서 장남 ‘신생’, 적족 자매의 언니가 낳은 중이, 적족 자매 동생이 낳은 ‘이오’ 등이 있었다.

헌공의 여색으로 인한 비극의 가족사는 그가 말년에 ‘여희’란 여인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역사 속 지존의 여인들이 그러했듯 여희는 자신의 아들인 ‘해제’를 헌공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그 첫 단계로 천성이 착하디착한 전처의 소생인 신생을 부친 독살 미수라는 죄를 뒤집어 씌어 자결하게 만든다. 여희는 나머지 장성한 아들들인 중이와 이오에게도 자결을 강요하나, 유순한 신생과 그들은 달리 명을 거역하고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중국 산서성 후마시 신전광장에 서 있는 진문공상 (사진출처 네이버포토)
중국 산서성 후마시 신전광장에 서 있는 진문공상 (사진출처 네이버포토)

중이는 어머니의 고향인 ‘적(狄)’으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아내를 얻어 두 명의 자식까지 낳으며 평안한 12년을 보내게 된다. 중이가 적국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고향인 진나라의 왕좌에 오를 기회가 처음으로 찾아온다. ‘이극’에 의해 계모인 여희의 아들 해제와 그 뒤를 이은 ‘탁자’가 살해되어 중이에게 등극을 권유했으나, 중이는 어수선한 국내 사정과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극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결국 중이의 동생 이오가 재위에 올라 ‘진 혜공’이 된다. 이 일은 단기간으로 보면 중이의 어리석은 실수라고 할 수 있으나, 오랜 시간을 두고 보았을 때 현명한 처신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동생인 이오, 진 혜공은 욕심이 많은 경박한 이었다. 인품이 좋아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형 중이에게 언제든 권좌를 빼앗길 수 있다고 여긴 진 혜공은 형을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자객을 보낸다. 어쩔 수 없이 중이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적에 둔 채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떼는데, 당시 55세였던 그는 아내에게 “25년이 지나도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시오”라고 하자, 그녀는 “그때 이미 자신이 죽은 뒤라 무덤에 측백나무까지 자랐겠지만 그래도 당신을 기다리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기약할 수 없는 방랑길에 오른 남편을 오년 동안 기다리는 것도 지칠 법 한데, 후일 제나라에서 젊은 부인을 얻어 5년을 잘 먹고 잘 살았던 중이의 25년을 기다려달라는 말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매우 이기적이다. 남편의 무리한 부탁에 어이가 없었겠으나 끝까지 수절하겠다는 부인의 진정성 있는 답변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후 충심 강한 부하들과 여섯 나라를 떠돌며 중이는 제대로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다. 위나라로 향했으나 상거지 꼴의 그들을 냉대했고 일행은 ‘오록’이라는 땅에서 농부에게 음식을 구걸하다 수모를 겪는다. 자신들보다 못한 거지꼴의 왕족을 놀리려는 심산이었던지 농부는 구걸한 그릇에 흙을 담아주며 조롱한다. 중이는 격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으나 부하 조쇠가 “흙을 얻는 것은 이 땅을 얻는 것이다”라고 달래는지라 그는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삼키며 털썩 주저앉았다. 후일 중이가 진 문공이 되었을 때 이곳을 침략하여 그때 받은 푸대접을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19년의 인고의 세월을 진문공과 함께한 신하들 (그림출처 다음포토)
19년의 인고의 세월을 진문공과 함께한 신하들 (그림출처 다음포토)

갖은 수모를 겪으며 여기저기를 떠돌던 중이의 일행은 제나라에서는 제대로 대접받고 안착한다. 제 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이미 알고 있었던지 그에게 어여쁘고 젊은 아내와 함께 20승의 마차와 화려한 저택을 제공한다. 선녀와 함께 산해진미를 즐기며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내던 중이의 행복은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에 의해 5년 만에 끝나고 만다. 중이의 제나라 아내는 부하들의 계획을 엿들은 자신의 여종을 죽이고, 남편에게 술을 먹여 곯아떨어지게 만들어 한밤중에 제나라를 떠나는 수레에 싣는다. 가다 깬 중이가 화가 나 외숙부인 호언을 죽이려고 했으나 충성스런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을 같이 할 생각으로 받아들인 남편을 다시 만나지 못할 여정으로 떠밀며 제나라 부인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을 것이다. 적국에서 얻은 부인도 그러하지만 제나라에서 맞이한 부인 또한 여인으로서의 욕심보다 남편의 장래를 더 우선시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분명 대담한 여인들이었고 그런 여인들의 마음을 열게 한 중이의 인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이 일행은 조나라에서 천박한 군주의 무례한 취급과 송나라의 환대, 정나라의 푸대접, 초나라의 자옥에 의한 살해 위협을 연이어 겪으며 점점 대업에 가까이 가게 된다. 동생인 진 혜공의 뒤를 이어 조카인 진 회공은 아버지의 경박하고 무례한 외교와 섭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진 혜공에게 은혜를 베풀고 배신당한 진(秦) 목공은 중이의 등극을 적극적으로 돕게 된다. 19년의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낸 중이는 이제 진 문공으로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진 8년의 꽃길을 걷게 된다. 개혁정치와 함께 혼란한 국내 여건을 안정시키고, 정복사업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자신에게 환대했던 송나라는 최선을 다해 도왔으나 조롱하고 수모를 준 위나라와 조나라는 냉정하게 그가 받은 모든 불손한 대우를 돌려주었다.

중국 허우마와 치워 근방의 진(晉)국박물관에 있는 진의 갑골문 문금 전서 등을 모아놓은 그림 (사진출처 윤태옥의 왕초일기님의 블로그)
중국 허우마와 치워 근방의 진(晉)국박물관에 있는 진의 갑골문 문금 전서 등을 모아놓은 그림
(사진출처 윤태옥의 왕초일기님의 블로그)
그림5. 중국 샤촌 지방에 있는 진문공의 묘라고 알려진 곳 (사진출처 윤태옥의 왕초일기님의 블로그)
그림5. 중국 샤촌 지방에 있는 진문공의 묘라고 알려진 곳
(사진출처 윤태옥의 왕초일기님의 블로그)

지난 번 칼럼에 소개했던 ‘태공망’과 달리 진 문공 중이의 기다림의 여정은 혼자만의 의지로 갈 수 없던 길이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충신들과 자신을 희생시킨 헌신적이었던 부인들이 같이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한 그들이 진 문공의 길에 머뭇거리지 않고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중이의 완성된 인격에 대한 확신이 선행되었을 것이라 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믿고 살아가고 싶으나, 혹독한 현실은 늘 우리에게 달콤한 승리보다 포기하고 싶은 깊은 좌절감을 자주 맛보게 한다. 모든 것을 놓고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곁을 지키는 작지만 그 무엇보다 강하고 큰 이들이 있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여정을 힘겹게 이어나갈 힘을 얻는다. 그들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나보다도 나 자신을 더 믿고 지지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진 문공처럼 화려한 꽃길로 보답 받지 않더라도 인생이라는 비포장길을 걸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채, 오늘도 용기 있게 한 걸음 내딛어보자.

<저 자 소 개>
임 나 경 (林 娜 慶)
소설가, 각본가, 칼럼니스트(시니어 신문 역사 칼럼 연재 중).

<출간작>
『곡마』 (황금소나무, 2016)
『대동여지도: 고산자의 꿈’』 (황금소나무, 2016)
『사임당 신인선: 내실이 숨긴 이야기』 (황금소나무, 2017)
『댐: 숨겨진 진실』 (황금소나무, 2017)
『진령군, 망국의 요화』 (도서출판 밥북, 2017, 제24회부산국제영화제주최 2019아시아필름마켓 북투필름 선정작)


<시나리오>
방문객 (The Visitor), 2017. (제8회 북한인권국제영화제 초청작)
미라클 (The Miracl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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