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혁칼럼] 묘이불수(苗而不秀)
[김유혁칼럼] 묘이불수(苗而不秀)
  • 김유혁 단국대 종신명예교수
  • 승인 2019.02.2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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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이불수자유의(苗而不秀者有矣) 벼 싹 중엔 잘 자라지 못한 것도 있거니와
수이불실자유의(秀而不實者有矣) 잘 자란 것 중에는 결실을 못한 것도 있다

논어 ‘자한장(子罕章)’에 이런 구절이 눈길을 끈다. 곡식을 심고 가꾸다 보면 곡식의 삯이 잘 자라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잘 자랐으면서도 열매가 영글지 않은 것도 있다. 땀 흘리며 지은 농사인데 꽃도 피우지 못하고 자라지도 못한 것들이 눈에 띄거나 또는 싹이 잘 자라기는 했지만 열매가 영글지 않은 빈 쭉정이가 눈에 많이 띄면 그 농부는 논 밭둑에 주저앉아서 한숨만을 지을 것이다.

당음(唐音)에 ‘민농(憫農)’이라는 오언시(五言詩)가 있다.

서화당오천 한적화하토(鋤禾當午天, 汗滴禾下土: 벼논을 매다가 점심나절이 되니 땀방울이 벼 폭 아래 논바닥에 뚝뚝 덜어지누나),
수지반중손 입입개신고(誰知盤中飡, 粒粒皆辛苦: 밥상에 차려진 밥의 낱알 하나하나가 모두 농부의 쓰라린 고생 끝에 얻어진 것임을 뉘라서 알리오?)라는 시가 그것이다.

농부의 힘든 땀의 보람임을 절실히 생각하게 한다. 그런 농부에게 꽃도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영글지 못한 벼 폭이 눈에 띈다면 그 농부의 실의와 절망은 어떠할까? 능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는 사회현상을 비유해서 한 말이다. 원문에서 말하는 수(秀:吐花曰秀)는 꽃이 핀다는 뜻이며, 수이불실(秀而不實)은 꽃은 피웠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말한다.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했다면서 성취하지 못한 무리를 수이불실(秀而不實)이라 비유했다. 그런 부류를 일컬어 이율곡 선생께서는 구이지학(口耳之學) 또는 삼촌지학(三寸之學)이라 꼬집었다. 이는 얻어들은 것을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무리로서 그들의 학문이라 자칭하는 깊이와 기리는 세 치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입에서 귀까지의 길이가 세 치(三寸)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른바 선거직 공직자 및 학벌, 향벌, 문벌, 연벌(學閥 鄕閥 門閥 緣閥) 등을 배경으로 하여 임용된 사람들 가운데 수준 저하와 함량미달(含量未達)한 무리가, 일어탁수(一魚濁水)격의 방종을 저지르고, 어로불변(魚魯不辨)하는 착각에 빠져들며, 촉견폐월(蜀犬吠月)하는 오판을 범하고서도 도리어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이비들이 변색충(變色虫) 노릇을 하는 사례를 보게 될 때마다 타기(唾棄)를 금하기 어렵다.

일어탁수는 사회를 혼탁시키는 분자를 말하며, 어로불변은 본질이 다른 것을 동일시하는 착시군상(錯視群象)을 말하고, 촉견폐월은 구름 낀 날이 많아 맑은 하늘을 보기 어려운 촉나라 땅에서는 보름달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개들까지도 보름달을 멋처럼 보게 되면 무슨 변고인 양 알고 밤새워 짖어대곤 했다고 한다. 이는 정상과 비정상을 뒤바꿔서 선순환과 악순환을 구별 못하는 무지한(無知漢)들을 말한다.

정도이탈자와 착시군상과 무지한들이 만일의 경우, 일당을 이룬다면 그런 집단에 의하여 벌어지는 결과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모두가 공존하는 실존사회 속에는 이른바 사회인의 벌선(閥線)을 넘어서 바라보면, 우자와 졸자. 현인과 어리석은 자, 능력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優拙 賢愚 能慢)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래도 정도(正道)와 정견(正見)과 선순환론자(善循環論者)들은 얼마든지 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기피하는 이른바 승기자염지(勝己者厭之)하는 사회벽(社會癖)과 이퇴계 선생께서 역설했던 식자층의 사람들일수록 사기종인(捨己從人)하는 겸허함을 모르는, 이른바 인간편벽증(人間偏癖症)을 지닌 자들이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나라 백성은 폐민(廢民)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은 못살겠다는 신음의 울부짖는 소리요, 개점휴업(開店休業)은 상공인들이 현장에서 실감하고 있는 공황(恐慌)을 통고하는 소리요, 폐문개창(閉門開窓)은 실 가닥 같은 희망이라도 있을까 하는 요행심의 표현이다. 그와 같은 심정은 논 밭둑에 주저앉아서 수이불실(秀而不實)한 곡식이삭을 품에 안고 한탄하는 농민의 괴로운 심정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예부터 농업이라는 것은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였다. 따라서 수이불실은 천하의 대본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이처럼 근본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나라의 기틀(國基)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특히 민의는 우측 가도와 좌측 가도에 나누이어서 대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다. 이는 국론의 분열이다. 누구든 사회적 현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현실이 두려워서 기피한다면, 국민을 사랑한다면서 그들이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일부 공영 보도 매체가 거의 편파 보도에 기울어져 있다는 지적이 많다.

어떤 경우에도 현실을 호도하고서는 현실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군중도 백성이요, 민중도 백성이다. 그러나 군중은 선동에 의해서 움직이기 쉽고 민중은 자주적인 자기 의견을 지니고 행동한다. 따라서 군중은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참여와 이탈의 성향이 두드러지지만, 민중의 경우에는 자주적인 의견을 지니기에 대의명분을 중요시한다. 일반적으로 사익에 따라 경망스레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민중은 언제나 애육여수(愛育黎首:千字文)의 대상이요, 군중은 교화성속(敎化成俗:鄕約條 )의 마음으로 도듬어가야 한다. 버려야 할 백성은 한 사람도 없다.

어떤 정권에서는 우리정부, 참여정부라는 용어를 쓴 적도 있었지만 그 의미 속에는 “우리 아닌 국민” 또는 “참여 이외 국민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농민의 경우 알곡도 수확하지만 그 밖의 북데기도 거두어 드려서 퇴비자료로 쓰곤 한다.

논어의 글귀에 담긴 심장한 의미를 되뇌어봄 직하다. 가을이 되면 알곡이 영근 이삭은 고개를 숙이지만, 쭉정이는 속이 비어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자신이 쭉정이임을 알거든 스스로 자리를 떠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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